다채로운 역사의 배경, 지중해 아드리아해 - 항해작가가 선택한 역사항해

아드리아해

푸른 바다와 중세시대의 거리가 보존되어 있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리조트 지, 아드리아해. 해안선을 따라 보이는 거리들은 세계유산에도 등록될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고대 로마시대에서 중세, 근현대까지 수 많은 역사의 무대가 된 아드리아해를 이번 레포트에서 소개합니다.

라이터 소개: 카나마루 토모요시(크루즈 전문 라이터)일본 각지를 비롯해 세계 5대륙을 크루즈로 방문한 경험을 가진 크루즈 전문 라이터. 세계의 크루즈선을 소개하는 '크루즈쉽 콜렉션'의 집필과 잡지'크루즈'(해사프레스사) 등에 크루즈와 관련된 기사와 컬럼등을 기고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생가가 있는 코르출라 섬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항구 도시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의 사이에 떠 있는 작은 섬 코르출라 섬. 이 작은섬에는 이탈리아의 모험가 마르코 폴로(1254경-1324년)의 생가라고 알려진 탑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출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코르출라 섬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하에 있어 코르출라 섬 출신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현재 아드리아 해에는 과거 다양한 역사를 거쳐 해안을 따라 많은 나라들이 있으며 각 나라들을 방문하는 크루즈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 교를 박해한 로마황제의 궁전 

로마제국의 군인황제시대로 불리는 3세기, 이 당시 로마제국은 분열과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수습한 것이 병사 출신에서 황제까지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244-311년) 황제였다. 그리스도교의 박해, 제국재건을 위해 다양한 개혁의 실시하였으나 급속히 나빠진 건강으로 그는 305년 생전에 황제를 퇴위한다. 퇴위한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고향과 가까운 스플리트에 궁전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고 알려진다. 이 궁전은 7세기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 피난온 인근 도시 주민들의 거처로 활용되며 이 궁전을 중심으로 스플리트는 발전하게 된다. 13-14세기에 이르러 황제의 영묘는 대성당으로, 유피테르 신전은 세례당으로 개조되었다. 생전에 그리스도를 박해한 황제의 궁전이 그리스도교의 시설로 활용된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궁전이 이렇게 활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지진으로 쇠퇴한 해양도시국가

아드리아해의 패권을 장악한 베네치아 공화국. 당대 베네치아의 라이벌은 같은 해양도시국가인 라구사 공화국이었으며 그 중심에 현재의 두브로브니크가 있었다. 라구사는 현대적인 법체제를 정비, 15세기에는 의료제도까지 확립한 당대의 첨단을 달리는 국가였다. 1317년에는 현재도 영업을 하는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개업, 그 이후 양로원과 격리병동, 고아원 등이 차례로 문을 열었다. 1418년에는 노예무역 폐지 및 해양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라구사의 이러한 영화도 단 하루만에 문을 닫게 되었으니 그 계기가 바로 지진이었다. 1667년 발생한 대지진으로 약 5천명이 넘는 시민가 사망하고 도시 대부분의 공공건물이 붕괴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쇠퇴의 길을 걸은 라구사는 결국 1808년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어 그 막을 고하게 된다.

두브로브니크가 크로아티아 발전의 땅이 된 이유

라구사 공화국(두브로브니크)는 발칸 반도의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을 지켜나갔다. 라구사는 1718년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트리아 제국과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 측의 경계에 위치한 라구사는 양국간에 완충지대 네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네움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가 되어, 1991년 유고 해체 후 그대로 동국에 편입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을 크로아티아인이 차지하는 네움에 의해 두브로브니크는 본국과 분단되게 된다.

이탈리아의 빈, 항구도시 트리에스테

1382년, 자치도시 트리에스테의 시민들은 주변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에 의지하고, 그 영지에 스스로를 편입함으로써 자치를 지켰다. 1719년부터는 자유항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무역항·조선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 영향으로 현재도 트리에스테에는 비엔나풍의 건축물이나 커피 하우스를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와 함께 1920년 트리에스테는 540년 만에 이탈리아로 '복귀'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내륙국 오스트리아의 무역항이라는 트리에스테의 희소성은 상실되고 대신 국제분쟁의 무대로 변모해 간다.

철의 장막이 낳은 바다의 출구

"발트해의 슈체친(폴란드)에서 트리에스테까지 유럽대륙을 나누는 철의 장막이 쳐졌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의 연설문에 나오는 문구이다. 연설문에서처럼 트리에스테는 2차대전 이후 동서냉전의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2차 대전이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사이 트리에스테의 영유권을 두고 분쟁이 발생, 결국 1947년 트리에스테는 영국과 미국에 의해 A,B 두개의 지역으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나뉘어진 지구는 54년 A지구가 이탈리아, B지구가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해체와 함께 B지구는 독립한 슬로베니아에 귀속, 이후 슬로베니아의 바다의 출구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말까지 유럽에서 쇄국정책을 한 나라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 노선을 채택한 유럽의 알바니아. 최초 알바니아는 소련의 영향을 받았으나 1960년대 소련과 대립하며 중국에 접근, 70년대 이후에는 다른 동유럽 국가와 다른 쇄국 정책을 취한다. 그러나 다시 중국의 서방국가의 교류를 비판하며 국토 전체 50만기 이상의 방어기지를 만들게 된다. 알바니아의 이러한 노선은 동,서 양쪽 진영에서 외면받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결국 80년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반정부 데모가 일어나 92년 비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발칸 반도의 복잡한 역사를 품고 있는 아드리아 해를 방문하면 이러한 과거의 역사의 단면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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