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리조트지가 가진 여러가지 얼굴들 - 항해작가가 소개하는 역사항해 -

카리브해

아름다운 바다가 방문객을 매료시키는 카리브 해의 섬들. 이 열대성 기후의 해변 리조트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카리브해 크루즈와 쿠바 혁명의 관계, 과거 해적들의 거점이 된 항구도시, 그리고 유명한 일본 만화가 테츠카 오사무의 명작 등, 카리브해를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라이터 소개: 카나마루 토모요시(크루즈 전문 라이터)일본 각지를 비롯해 세계 5대륙을 크루즈로 방문한 경험을 가진 크루즈 전문 라이터. 세계의 크루즈선을 소개하는 '크루즈쉽 콜렉션'의 집필과 잡지'크루즈'(해사프레스사) 등에 크루즈와 관련된 기사와 컬럼등을 기고하고 있다.

쿠바 혁명을 낳은 카리브해 크루즈

세계적인 크루즈의 중심지인 카리브해. 이 곳이 크루즈의 명소가 된 계기는 1959년 쿠바 혁명으로 탄생한 피델 카스트로(1926-2016)의 사회주의 정권이었다. 혁명전 쿠바는 미국인에게 가장 인기있는 리조트지였다. 하지만 1961년 미국과 쿠바가 국교를 단절하면서 쿠바를 찾았던 휴양지를 잃어버렸고 이에 멕시코 및 카리브 연안 국가들은 이들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게 된다. 여기에 주목한 미국 선사가 1970년대 카리브해 주변 크루즈를 시작하여 큰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지금도 카리브해는 많은 크루즈 객선들이 다니는 해역이 되었다.

카리브 해적의 본거지, 포트 로열

카리브의 해적. 영화 , 혹은 이를 테마로한 유원지 등에서 익숙한 카리브의 해적은 17세기에 가장 활발하였으며 그 배후에는 영국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스페인의 상선을 약탈하는 자국 해적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들은 영국에 많은 부를 가져다 주었다. 이 시대 특히 유명한 해적으로 헨리 모건(1635-88)이 있었으며, 그는 후일 자메이카의 부총독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그가 약탈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 바로 자메이카의 포트 로열이며 약탈한 보물과 물자를 보관, 소비하는 것으로 도시는 것으로 도시는 이름을 알리게 된다. 최전성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잔혹한 도시라는 별명까지 가진 이 도시는 헨리 모건의 사후, 1692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도시의 2/3이 바다에 잠겨버리며 거점으로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 대지진으로 인해 헨리 모건의 묘까지 바다에 잠겼다고 알려진다.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인구 30명의 마야문명의 성지

마야문명은 기원전 약 1천년에서 16세기까지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남동부에서 벨리제에 이르는 중앙 아메리카 지역에서 번영한 문명이다. 이에 도시의 이름에서도 마야문명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코스멜은 마야어로 "제비의 섬", 그리고 벨리제의 국명은 "흙탕물"을 의미하는 마야어에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코스멜은 마야의 달의 여신의 성지로 당시 약 4만명의 인구가 생활하는 섬이었으나 16세기 스페인 선원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로 인구가 급감, 1570년에는 불과 30명만이 남게 된다. 이후 1848년 유카탄 반도에서 일어난 마야족의 반란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코스멜로 모이며 도시의 인구는 다시 늘어가게 되며 1960년 이후 스쿠버 다이빙의 성지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달해 왔다.

나라 이름과 화폐에 사용되는 남미 해방의 아버지

베네수엘라의 정식 국명은 페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 통화 단위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이다. 이 "볼리바르"는 시몬 볼리바르(1783-1830)에서 유래한 것으로 스페인 지배하의 남미 각 나라들을 해방한 독립영웅에서 유래하였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태어난 시몬 볼리바르는 카르타헤나(콜롬비아)에서 스페인에 대한 철저항전을 선언, 콜롬비아, 볼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페루 등 5개 나라의 독립을 실현하였다. 남미 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볼리바르의 명성은 남미에 그치지 않고 이집트까지 넘어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시몬 볼리바르 광장"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을 떨쳤다.

파나마 운하 건립공사에 반강제 노동을 한 폴 고갱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실업가 페르디낭 드 레셉스(1805-94). 그는 수에즈 운하에 이어 1881년 파나마 지협의 운하 건설에 착수한다. 1887년, 당시 전혀 유명하지 않았던 화가 폴 고갱(1848-1903)은 자금원조를 목적으로 친적이 사는 파나마에 왔으나 친척의 사기로 자금원조는 커녕 파나마 운하의 첨삭작업원으로 반강제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게 된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병에 걸린 고갱은 도망치듯 파나마에서 카리브해 프랑스 영토인 마르티니크 섬으로 떠나버렸고 여기서 제작한 열대의 작품은 후일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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